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9)
나는 왜, 어떻게 아나뱁티스트가 되었는가? (129)
아나뱁티즘의 특징은 ‘단순함’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의 특징도 ‘단순함’에 있습니다. 무얼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 너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해라 등등 주님의 가르침은 단순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어린아이들이라도 그 말뜻을 이해하는데 아무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지적으로,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꼭 그렇게 살아야 돼?’ 하는 반문이 생기는 데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가르침이 세상적 삶의 양식과는 구별되는 다른 삶의 양식을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적
삶의 양식과 충돌하거나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무얼 먹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일상이요, 누구나 다 부자가 되려 하고 부자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며, 원수는 때려 잡고 격멸시켜야 하는 대상이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세상적 삶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러한 세상적 삶의 양식을 신의 이름으로 지지하고 옹호하는 경우입니다. 기독교가 물신화하고 기복화할 때, 자본주의 이념에 동조할 때, 국가주의를 지향하고 힘을 추구할 때 그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은 부자가 되고, 부자들은 맛있고 값비싼 요리를 먹을 수 있으며, 원수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심판하고 물리쳐야 한다는 반(反) 복음이 성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정국가를 표방했던 중세 유럽에서 참혹한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오도된 신학에 근거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독교의 참된 진리를 찾고 그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는 일은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평생의 과제요 일상의 숙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 풍조에 대응하기 위해 신학이 학문화 되고 논리화 되며, 변증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복음의 ‘단순성’, 아나뱁티즘의 ‘단순성’에 도달하기 위해 저는 먼 길을 걸어와야 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들에게 지워진 이단의 역사적 굴레의 실체를 확인하고 이를 반박해야 했으며,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세상에 동화되어 버린 기독교와 교회의 현실을 직시해야 했습니다. 국가와 종교와의 분리를 주장하고 기독교의 국가주의화에 반대한 아내뱁티스트들의 주장이 복음을 훼손하지 않고 그 순수성을 지키는 데에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하여야 했습니다. 특히 현대를 살아가는 한국인의 의식, 무의식 구조 전반에 영향을 미친 산업화 이념과 반공주의 이념이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 한국 기독교가 복음의 순수성에서 멀어지게 된 역사적 맥락도 짚어보아야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제자도·공동체·평화를 신앙의 핵심으로 설정하고 이를 삶 속에서 구현하고 있는 아나뱁티즘이 여전히 우리 시대의 참 신앙의 모델이요, 순수한 복음의 원형임을 확인하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대해 대안적, 대조적, 대항적 성격을 갖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 살아 있고 복음의 급진성과 전복성을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 기독교 그룹임이 분명해 졌습니다. 맛과 향기를 잃고 시들해 지고 있는 한국 기독교와 교회들에게 소생(蘇生)의 성령의 바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전통적인 신학의 틀에서 더 나아가 우리 시대 현실의 문제들에 착안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다양한 분야의 분야별 신학, <생태신학> <장애신학> <평화신학> <하나님 나라 신학> <육화신학> <희년신학> <공공신학> <민중신학> <살림신학> 등이 제 눈을 밝게 해주었고 아나뱁티즘으로 가는 길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신학은 성경 해석학입니다. 또한 무엇을 주제로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전통신학은 기본적으로 <구속신학>을 핵심으로 <조직신학>을 얼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것은 바울의 표현대로 하면 그리스도교의 “초보”(히 6:1)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위에 열거한 신학들은 다양한 분야, 다양한 주제를 다룬 ‘분야신학’, ‘주제신학’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 신학은 그리스도의 “초보”에서 벗어나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히 6:2) 신학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들 신학은 변화하는 세상 환경과 조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신학이기도 하고,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여러 학문들과 통섭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전통신학을 기초로 하면서도 전통신학을 현실 세계의 다양한 분야에 실천적으로 적용하려는 시도이기도 하고, 전통신학이 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다양한 주제들을 신학의 주요 주제로 뽑아내서 이를 학문화 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들 신학의 등장으로 세상 변화에 대한 복음의 대응력은 높아지게 되었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적절하고 합당한 삶의 양식을 제공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 신학은 때론 전통신학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 소견에 이들 신학이 추구하는 바와 아나뱁티즘이 추구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500년을 이어온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과 삶의 뿌리는 깊고 넓어 이들 ‘분야 신학’의 요구를 온전히 수용하고도 남는 것 같습니다.